술 만드는 일

술 만드는 일
Photo by Sandy Ravaloniaina / Unsplash

취미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술을 마시는 걸로 모자라서 술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양주인 ’막걸리‘부터 배우고 있는데요. 일반적인 방법을 통해 만드는 햅쌀 막걸리는 1주 정도의 발효 과정을 거칩니다. 변수들을 바꿔가며 1주일 단위의 테스트를 해보는 중입니다. 아직 누군가에게 맛보일 수준은 아니지만, 올해가 50주 정도 남았으니 매주 만들어서 적게는 30~40번 정도만 개선해도 충분히 저 혼자 즐길 정도의 막걸리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희망회로 돌리는 중입니다. 

술 만드는 것에 흥미가 있는 저를 보고 동료들이 ‘술 만드는 게 왜 좋은지?’ 가끔 묻습니다. 일단 직접 만들어 먹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하는 게 제일 큰 이유죠. 그리고 제가 하는 소프트웨어 제품을 만드는 일과 술을 만드는 일의 성질이 매우 다른 것도 ‘술 빚는 일’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이유인듯 합니다. 

오늘은 제가 느끼는 그 차이를 이야기해보고 싶은데요. 두 가지 일의 차이를 일으키는 가장 큰 하나는 ‘시간’이라는 개념입니다.

시간은 예측 가능합니다. 일반적인 수준 내에서는 1초라도 어긋나는 법이 없죠. 내가 그 시간을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술은 그 자체로 시간이 재료인 아주 독특한 제품입니다. 내가 얼마나 더 기다리고, 덜 기다리느냐에 따라 맛과 향이 매우 달라집니다. 

더불어 식품적 속성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셔 없애버릴 수도 있죠. 정말 가치 있는 술이라면 마셔 없어짐과 동시에 남아 있는 같은 술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계속 높아집니다. 여기에도 시간이 큰 역할을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는 계속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일반적인 소프트웨어 제품을 만들면 제품의 완성 주기와 배포 주기가 2~3달을 넘기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요즘처럼 Build in Public과 Lean 방법론이 대세인 시기에는 그 주기가 극단적으로 짧아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양조는 딱 그 반대입니다. 어떤 교재와 설명을 봐도 빨리 하라는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기다리고 천천히 하라는 말로 가득한 것이 양조의 세계입니다. 아무래도 저의 일이 그 자체로 더 빠르고 더 많이 개선하는 성격이다 보니 기다림 그 자체에 가치를 두는 일이 독특하기도 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 엔씨소프트에서 일할 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는데요. 게임 하나를 완성하고 출시하는데 적어도 2~3년 이상의 시간이 걸립니다. 적은 인원이 투입되는 것도 아니죠. 일반적인 타이틀 하나에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의 인력이 투입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2~3년 동안 게임을 만든다는 건 엄청난 베팅을 한다는 것이죠. 그동안 게임 트렌드도 바뀔 수 있고 다양한 변수가 작동하는 등 불확실성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를 믿고 오랜 시간 지속하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게임 제작의 매력으로 느껴졌습니다.

직접 게임을 만들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기왕이면 나의 현실에서 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보는 것이 더 의미 있겠다 싶어서 술이라는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양조는 기다림을 기반으로 혼자서 만들어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수준의 제품이 아닐까요? 더 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적어도 10년은 해볼 생각으로 일단은 꾸준한 것에 집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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